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무엇인가
십자가화(cruciformity)가 하나님화(theoformity)다.
십자가 형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라!
권연경(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 김규섭(아신대학교 신약학 교수) 김형태(주님의보배교회 담임목사)
리처드 헤이스(듀크 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약학 조지 워싱턴 아이비 명예교수)
스티븐 핀란(Salvation Not Purchased 저자) 프랭크 마테라(미국 가톨릭 대학교 성서학 명예교수) 추천!
■ 책 소개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에 대한 바울의 견해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 주제이자 내러티브인 케노시스, 칭의, 테오시스를 연구한 책이다. 바울의 구원론에 대한 이 획기적인 연구에서 마이클 고먼은 십자가 형태(십자가를 닮는 모습)가 곧 테오시스(하나님을 닮는 모습)이며, 바울 구원론의 핵심이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에 있다고 주장한다. 성령에 힘입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성육신 그리스도에 동화됨으로써, 하나님의 케노시스적이고 십자가 형태인 성품에 변혁적으로 참여하라!
■ 차례
약어
감사의 글
서론 | 십자가 형태 하나님 안에 살다
바울과 테오시스에 관한 질문
1장 | “그는 하나님의 형태이신데도/형태이시므로”
바울의 마스터 스토리가 지닌 신학적 중요성 (빌 2:6-11)
2장 | “믿음으로 의롭게 되다/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에 의한 칭의: 바울 구원론의 논리
3장 | “내가 십자가 형태이니, 너희도 십자가 형태가 될지어다”
거룩함을 테오시스로: 바울의 삼위일체론적 재구성
4장 |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바울, 부활 그리고 폭력의 종말
결론 | 십자가 형태 하나님 안에 사는 것
바울의 내러티브 구원론으로서 테오시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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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리뷰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에 대한 바울의 견해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 내러티브인 케노시스, 칭의, 테오시스를 연구한 책이다. 바울의 구원론에 대한 이 획기적인 연구에서 마이클 고먼은 십자가 형태(십자가를 닮는 모습)가 곧 테오시스(하나님을 닮는 모습)며, 바울 구원론의 핵심이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에 있다고 주장한다. 성령에 힘입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성육신 그리스도에 동화됨으로써, 하나님의 케노시스적이고 십자가 형태인 성품에 변혁적으로 참여하라!
십자가화(cruciformity)가 곧 하나님화(theoformity)다
『십자가 형태의 하나님 안에 살다』는 마이클 고먼의 전작 『삶으로 담아내는 십자가』의 후속작으로, 전작 1장의 핵심 주장인 “바울에게 하나님은 십자가 형태(cruciform)였다”를 초점 삼아 개진한 연구다. 이 주장이 옳다면, 십자가화는 하나님화, 또는 테오시스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은 전작에서 충분히 개진하지 않은 이 테오시스 개념을 더욱 풀어 설명한다. 저자는 바울의 구원론의 토대를 구축하는 빌립보서 2:6-11 내러티브 구조에 드러난 그리스도의 내러티브적 정체성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내러티브적 정체성의 계시라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이 본문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계시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본문은 내러티브 측면에서 그분의 정체성을 ‘[x]인데도 [y]가 아니라 오히려 [z]’, 즉 ‘[신분]인데도 [이기심]이 아니라 오히려 [이타심]’으로 묘사할 수 있는 분으로 계시한다. 성육신과 십자가와 승귀가 드러낸 것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신성만이 아닌, 아담과 대비되는 그의 진정한 인성이다. 따라서 참된 인간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을 닮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저자는 십자가화, 즉 성육신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와 동화되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화이며,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형상으로 성령에 참여함으로써 탈바꿈되는 과정을 테오시스라고 정의한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에 의한 칭의’(justification by co-crucifixion)
“내가 십자가 형태이니, 너희도 십자가 형태가 될지어다”
저자는 이 책의 정수인 2장에서 바울서신의 핵심 본문 몇 가지, 특히 갈라디아서 2:15-21과 로마서 6:1-7:6을 들여다보면서, 칭의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을 통해 이루어짐을 보여 준다. 즉, 칭의는 언약적이며 십자가 형태인 그리스도의 내러티브 정체성에 참여하는 것으로, 결국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칭의 자체가 곧 테오시스다. 저자는 특히 갈라디아서 2:15-21과 로마서 6:1-7:6에 초점을 맞추고, 로마서 5:1-11, 고린도후서 5:14-21, 빌립보서 2:5-11의 도움을 받아 바울이 말하는 칭의 개념을 조사했으며, 칭의는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에 참여하는 풍성하면서도 잠재적으로 희생이 따르는 경험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어지는 3장에서 저자는 바울이 거룩함을 삼위 하나님, 즉 아버지, 아들, 성령의 십자가 형태 성품에 참여하고 본받는 것으로 재정의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신적 거룩함의 화신이신 그리스도에게 참여적으로 동화됨으로써 하나님처럼 거룩해진다. 그러므로 거룩함 또는 성화는 칭의의 부록이 아니라 칭의의 실현이다. 마지막 4장에서는 비폭력이야말로 십자가와 부활에서 계시되고 바울이 이야기하는 케노시스적인 십자가 형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삶의 본질적 증표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또한 바울이 회심 이후에도 폭력적 인격을 유지하고 표출했다는 존 게이저의 주장과, 신성한 폭력에 대한 르네 지라르의 주장과 그것을 바울에게 적용한 로버트 해머튼캘리의 해석을 다루면서 그에 대한 대답으로 앙리 레비와 미로슬라브 볼프의 연구 또한 다루어 바울의 폭력의 원인이 ‘정결 의지’에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테오시스: 바울 신학의 중심
생소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자기 비움이라는 케노시스 개념, 우리가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너무나도 놀랍고 어쩌면 조금은 위험해 보이는 테오시스 개념, 더불어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하는 칭의 개념을 이 책은 일목요연하게 테오시스라는 개념으로 수렴한다. 저자는 바울에 대한 전통적 관점과 새로운 관점을 통합하고 초월한 관점으로 바울의 구원론을 성경 본문에 입각해 해석했으며, 그 결론으로 테오시스, 즉 하나님을 닮는 것이 바울 신학의 중심이며, 의롭게 된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 속 하나님의 정의가 되는 데는 테오시스 외 다른 방도가 있을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자기를 비워 인간이 되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신실함, 혹은 그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해 하나님과 닮아 가는 이 모든 여정을 바울의 구원론이 어떻게 설명했으며, 이러한 설명을 이해해 신앙에 유익함을 더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유익하고 은혜로운 안내서가 되어 줄 것이다.
■ 주요 독자
바울 연구에 관심 있는 모든 독자
케노시스, 칭의, 테오시스의 개념과 해석을 배우고 싶은 독자
바울의 구원론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이 어떻게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어지는지 궁금한 독자
바울에 대한 전통적 관점과 새로운 관점을 통합하고, 이를 초월한 관점이 무엇인지 궁금한 독자
빌립보서 2:6-11과 갈라디아서, 로마서 등에 나타나는 칭의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
■ 추천의 말
최근 얄팍한 칭의론/구원론을 교정하려는 시도가 다각도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책도 그런 중요한 시도 중 하나다. 저자의 핵심 본문은 빌립보서 2:6-11이다. 그는 바울의 칭의론이 우리가 하나님께 참여하는 ‘하나님화’를 바라본다고 말한다. 이렇게 그는 칭의의 지평을 넓힌다. 또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찾아오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하는 ‘십자가화’를 통해 하나님께 참여하는데, 곧 십자가에 참여하는 거룩함이 칭의의 핵심이다. 이를 통해 고먼은 칭의와 그 이후의 삶을 나누어 생각하려는 습관 역시 잘못된 것임을 보여 준다. 그는 칭의론의 중요 본문인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의 주요 논쟁거리를 내러티브적 관점으로 솎아 내며 십자가 형태의 거룩함이 구원의 본질적 과정이라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거룩함은 비폭력과 화해의 자태로 드러난다. 이런 삶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길을 걷게 된다. 늘 듣던 믿음과 은혜 ‘타령’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해 온 사람들, 신앙이 내 삶과 따로 노는 것의 불편함을 해소하려는 이들에게, 보다 포괄적이고 깊은 칭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책이 매우 유익할 것이다.
_권연경 |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 『위선』 저자
유학 시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책이 번역 출간되어 무척 반갑다. 마이클 고먼은 바울 윤리를 논의할 때 빠지지 않는 가장 중요한 학자 중 하나다. 고먼은 이 책에서 바울 신학의 핵심을 풍성하게 재발견한다. 이 책은 교부신학에서 중요한 개념인 테오시스를 바울 신학의 중심으로 이해하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빌립보서 2:6-11에 나타난 그리스도 이야기를 이 관점에 따라 설명한다. 궁극적으로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이란 하나님 자신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는 삼위 하나님의 십자가 형태의 성품과 생명에 변혁적으로 참여하는 것임을 이 책은 규명해 낸다. 『십자가 형태의 하나님 안에 살다』는 무엇보다도 흥미진진하다. 바울 신학의 핵심을 ‘변화’라는 역동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유익하고 새로운 통찰을 발견할 것이다.
_김규섭 | 아신대학교 신약학 교수
“바울 신학의 중심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종교개혁 이후로 ‘칭의’라고 대답하는 학자들이 대다수였으나,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칭의’를 달의 보조 분화구에 비유하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혹은 ‘참여’(그리스도 안에 참여함)라는 주제를 바울 신학의 중심으로 새롭게 부각시켰다. 이후 바울 학계는 종교개혁 전통을 따르는 학자들이 여전히 ‘칭의’를 바울 신학의 중심으로 여겨 온 반면, 슈바이처가 제시한 길을 따르는 샌더스, 헤이스 등의 영향력 있는 학자들이 ‘참여’를 보다 중요한 바울 신학의 중심으로 주장하면서, ‘칭의’와 ‘참여’를 서로 대립적인 관계로 이해하는 경향이 생겼다. 마이클 고먼은 이 책에서, 자신의 전작 『삶으로 담아내는 십자가』에서는 암시되었지만 길게 논증하지는 않았던 주제인 “하나님은 십자가 형태(cruciform)다”라는 주장을 동방 정교회전통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테오시스’라는 주제와 연결시켜 주해적으로 풀어낸다. 그와 동시에 칭의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 혹은 더 나아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칭의’와 ‘참여’에 대한 기존 이분법적 이해에서 벗어나, 칭의, 참여, 성화, 테오시스 등의 주제를 ‘바울의 구원론’이라는 하나의 우산 아래에서 멋지게 엮어 낸다. 이 작업의 결과로 이른바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이라는 틀에서 논리적 선후 관계로 따로 놀던 칭의와 성화가 하나의 구원론 아래에서 제자리를 찾아가게 해 준다. 또한 믿음과 행위라는 대립 구도 속에서 ‘행함 없는 믿음’으로 변질되었던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으로, 개인적일뿐 아니라 공동체적이고 공적인 신앙으로 다시 태어난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성서학적 연구가 교의학, 더 나아가 교회의 신앙에 어떤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좋은 예다.
_김형태 | 주님의보배교회 담임목사
바울에 대한 이 풍부하고 종합적인 해석은 바울 구원론의 핵심이 테오시스, 곧 하나님의 백성이 십자가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에 참여하는 것에 있음을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마이클 고먼은 결실 없는 이분법을 극복하며 ‘바울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전통주의 비평가 사이의 최근 논쟁을 초월하는 강력하고 건설적인 설명으로 바울 신학에 관한 최근 논쟁의 결과를 능숙하게 통합한다. 『십자가 형태의 하나님 안에 살다』는 바울 복음의 비폭력적이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성격을 이해하기 위한 길을 제시한다.
_리처드 헤이스 | 듀크 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약학 조지 워싱턴 아이비 명예교수
『십자가 형태의 하나님 안에 살다』는 바울에 대한 분할된 접근 방식에 중요한 교정 역할을 하며, 칭의를 영적 변화와 명료하게 연결한다. 믿음, 사랑, 행동이 합쳐지면 테오시스—즉,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성품을 취하는 것—가 된다. 마이클 고먼은 다른 학자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면서도 신선하고 독창적인 접근 방식으로 바울의 생생한 신학을 조명한다. 『십자가 형태의 하나님 안에 살다』는 바울 연구를 분명하게 발전시키고 있다.
_스티븐 핀란 | Salvation Not Purchased 저자
마이클 고먼은 이 선구적인 연구에서 칭의와 거룩함에 대한 바울의 이해를 새롭게 보는 방법을 제시한다. 오래된 영토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고먼은 비폭력과 십자가의 변화시키는 힘에 뿌리를 둔 거룩함과 칭의의 비전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의 연구는 목회자들에게는 설교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고, 학자들에게는 오래된 질문을 해결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공할 것이다.
_프랭크 마테라 | 미국 가톨릭 대학교 성서학 명예교수
■ 책 속으로
본서에 지워진 과제는 바울의 그리스도 경험이 정확히 그 자체로 하나님 경험이었다는 사실과, 우리가 그 내용을 가능한 온전하고 적절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다른 신학 언어를 발명하거나 빌려 와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것이 곧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이었고,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곧 하나님을 닮는 것이었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곧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었다. 최소한으로 말해 이 사실은 바울에게 ‘십자가화’(cruciformity), 즉 십자가에 못 박힌(crucified) 그리스도와의 동화(同化, conformity)는 정말로 ‘하나님화’(theoformity), 혹은 테오시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주장들에 관한 본서의 논의는 또한 바울의 유명한 표현인 ‘그리스도 안에’가 바울에게는 ‘하나님 안에/그리스도 안에/성령 안에’의 줄임말이었다고 제안할 것이다. 즉, 바울의 그리스도 중심성은 사실 암시적인 삼위일체론이었다.
_서론 | 십자가 형태 하나님 안에 살다
빌립보서 2:6-11 연구에서 해소되지 않는 끈질긴 질문 중 하나는 이 본문의 배경(들)과 출처를 둘러싼 문제다. 그런데 우리가 빌립보서 2:6-11에 접근할 때 절대 잊으면 안 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본문이 시적 내러티브라는 사실이다. 대부분 시와 마찬가지로 이 본문도 풍부한 은유와 암시를 담고 있으며, 그렇기에 출처 혹은 심지어 ‘배경들’보다는 상호텍스트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마도 더 정확할 것이다. 물론 적절한 역사적·문헌학적 정밀성을 추구하긴 해야겠지만, 또한 상호텍스트적 씨줄과 날줄로 직조된 이 작품 속에 존재하는 의미론적 중첩과 모호함을 그대로 안고 가는 법도 배워야 한다. 이 시적 상호텍스트성 개념에는 이러한 본문 안에 서로 창조적 긴장 관계에 있는 단어, 암시, 반향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혼란만 남는다는 의미도 아니고, 시적 내러티브에는 아무런 내적 구조와 일관성, 플롯, 혹은 논리가 없다는 의미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자료의 출처나 사전학과 관련된 절대적 정확성을 추구하려는 노력을 내려놓으면, 우리는 시 자체를 설명하기 위해 시를 들여다볼 수 있다. 이 본문에서 논란이 되는 단어와 구절 중 다수는 시 내부에서 그 의미를 얻는다. 더욱이 시의 전체 의미는 바울이 이 시를 근접 문맥과 빌립보서의 다른 곳에서, 그리고 우리가 가진 바울서신 전체에서 어떻게 활용하는지 그리고 그럼으로써 해석하는지 조사함으로써 파악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적 본문을 체계적인 기독론에 관한 논문으로 취급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 내러티브가 신학적 의미를 전달했고 또한 전달한다는 합리적인 가정을 할 수 있다.
_1장 | “그는 하나님의 형태이신데도/형태이시므로”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울에게는 두 가지 구원론 모델(법정적 모델과 참여적 모델)이 아니라 하나의 모델이 있었는데, 그것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에 의한 칭의로서, 그 의미는 언약의 정수를 담은 그리스도의 행위, 즉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보인 그 믿음과 사랑의 행위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 및 이웃과의 올바른 언약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 한번의 행위는 율법의 ‘수직적’ 요구와 ‘수평적’ 요구 모두를 성취해서, 그 행위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그와 동일한 생명을 주는 율법 성취를 경험하며, 그 경험 안에서 죽음을 통한 부활이라는 과정, 그 역설적이고 기독론에 기초한 과정을 시작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와 동화되는 과정(십자가화・그리스도화)에 첫발을 내딛게 되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그것은 곧 하나님화(theoformity) 혹은 신화(deification)의 과정이기도 하다.
_2장 | “믿음으로 의롭게 되다/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다”
넓게는 제2성전기 유대교 문헌에서 혹은 좁게는 바울서신에서 그리스어 동사 ‘디카이오오’(dikaioō) 및 관련 단어들로 표현되어 있는 ‘칭의’ 개념은 때때로 편협한 ‘어휘 연구’의 대상이 되었고, 마치 단순하게 그 단어 자체가 등장하는 경우만 분석하면 이 광범위한 신학 개념에 관한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듯이 연구되었다. 하지만 유대교의 신학 개념으로서 칭의를 대상으로 삼는 모든 논의는 서로 겹치는 개념인 언약, 생명, 그리고 당연히 정의/의와 반드시 연결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바울에게 칭의는 무엇이었는가? 내가 주장할 내용은 바울에게 칭의란 (하나님을 향한) ‘수직적’ 혹은 신학적 관계 및 그와 불가분한 (타인을 향한) ‘수평적’ 혹은 사회적 관계 모두에서 올바른 언약 관계의 수립 혹은 회복을 뜻하며, 바울은 그것을 언급할 때 ‘피스티스’와 ‘아가페’를 가장 빈번하게 사용했고, 또한 거기에는 궁극적인 신원과 영광에 대한 확실한 소망이 포함되며,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 성령에 비추어 이해되고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경험된다는 것이다.
_2장 | “믿음으로 의롭게 되다/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다”
다시 한번 우리는, 신자들이 최초에 그리고 계속해서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분이 부활하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the resurrected crucified Christ)라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이 점은 기독론과 구원론 두 측면 모두에서 다음 두 가지 의미로 중요하다. 첫째, 다시 일어나신 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으로서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은 단지 은유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임재가 신자를 탈바꿈시키고 신자에게 활기를 불어넣는 살아 있는 인격이신 분과의 만남에 관한 적절한 묘사다. “사는 것은 더는 내가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시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삶은 자기 자신을 주심으로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신실함으로 사는 것이라.” 더글러스 캠벨의 말처럼, “이것은 단순히 ‘이미타티오 크리스티’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자들에게]…그리스도를 모방하라기보다는(아마도 이것은 불가능한 과제일 것이다) 그 안에 거주해서 혹은 그 안에 내주해서 하나님의 성령이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 의 모습으로 적극적으로 재형성하게 하라고 요청하기” 때문이다. 역사적 예수의 충성과 사랑 안에서 알려진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케노시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실을 계속해서 정의하며, 따라서 그분이 생기를 불어넣은 사람들의 현실도 계속해서 정의한다. 둘째, 그렇다면 우리가 1장에서 확인했듯이, 부활하신 분은 여전히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다. 케제만의 유명한 말처럼 “십자가는 부활하신 분의 서명이다.” 앞에서 묘사한 바 ‘십자가화로서-현재적-부활’의 역설적 특징을 요구하고 허용하는 것이 바로 이 기독론적 현실이다.
_2장 | “믿음으로 의롭게 되다/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다”
그렇다면 빌립보서 2:6-11은 순종하는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내러티브적 정체성과 거룩함뿐만 아니라,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내러티브적 정체성과 거룩함도 드러낸다. 본서 1장에서 강조했듯이, 이것은 반직관적이고 반문화적이며 반제국적인 형태의 신성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리스도의 의미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를 바울이 원한다는 의미다. 분명히 바울은 그리스도가 행한 일이 반직관적이고 지나칠 정도로 관습을 벗어났음에도, 궁극적으로는 신성의 위반이 아니라 신성의 표현이며 그렇기에 하나님의 거룩함의 표현이라고 암시한다. 그렇지 않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품을 저버린 것이라면, 어떻게 ‘하나님과 동등할’ 수 있겠는가? 본서 1장에서 주장했듯이, 이 말의 의미는 ‘그는 하나님의 형태이신데도’가 사도 바울의 더 넓은 사고 체계에서는 ‘그는 하나님의 형태이시므로’의 뜻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_3장 | “내가 십자가 형태이니, 너희도 십자가 형태가 될지어다”
하지만 여기서 급히 덧붙여야 할 내용이 있다. 그것은 십자가화의 구현(예를 들어, 자기희생)이 반드시 성령의 사역은 아니라는 점이다. 바울에게 십자가 형태의 자기희생이 거룩함의 독특한 차원이며 필수 조건인 것은 맞지만, 그것이 거룩함의 전부는 아니다. 특히 앞서 확인했듯이, 바울에게 성적인 거룩함이 없는 십자가화는 결코 거룩함이 아니다. 그것은 사이비 거룩함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한 ‘자기희생’의 대가로 금전이나 다른 형태의 보수를 받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기희생의 행위가 아니다. 더욱이 바울은 성적 방종/부도덕이 십자가 형태 실존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그런 모습은 십자가를 통해 사람의 몸을 속량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을 적절하게 적용하지 못한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특정한 순종의 형태를 드러내지도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성적 부도덕[그리스어 ‘포르네이아’(porneia)—“동성애 행위와 일반적인 성적 부도덕을 포함하는…‘불법적인 성관계’”]과 십자가 형태 사랑은 공존할 수 없다. 왜냐하면 ‘포르네이아’는 기껏해야 자기애의 한 형태이며,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개인과 공동체 모두의 거룩함을 약화하는 자기 탐닉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_3장 | “내가 십자가 형태이니, 너희도 십자가 형태가 될지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상태—약함, 경건하지 않음, 죄인, 원수—에 관해 그리고 그런 그들과 화해하시려는 하나님의 반응에서 확인되는 순전하고 반직관적인 연민과 은혜에 관해, 이보다 더 냉정한 설명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주도하시며, 자신을 향한 인류의 반역과 그들 스스로 만들어 낸 적개심에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시지 않고 비범한 은혜로 대응하신다. 보통 인간이 유혹당하는 방식, 즉 원수를 짓밟고 부정한 타자를 제거하는 방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신 하나님의 반응이 아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사람들을 하나님 자신께 화해시키려, 그리고 사람들과 사람들을 화해시키려 먼저 손을 내미신다. 그래서 윌러드 스워틀리(Willard Swartley)는 다음과 같은 올바른 주장을 한다. “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평화, 그리고 이전에는 소원했던 사람들 사이의 평화를 이룬다는 개념은 바울의 교리적·윤리적 사상에서 너무나 중심적이어서, 그 핵심에 평화와 화해를 두지 않고는 바울 사상을 충실하게 재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한 은혜에 대한 인간의 적절한 반응은 무엇보다도 단순히 그 은혜를 수용하는 것이다. 아니, 더 바울답게 표현하자면, 그 은혜에 의해 수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거기서 끝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 안에서 확장되어, 심지어 하나님의 원수들에게도, 신적 질서에 반항하는 사람들에게도 미치기 때문에, 바울에게 사랑의 필연적 결론은 비보복과 비폭력이다.…이것이 바로 신적 사랑과 화해에 관한 바울 복음에 뿌리내린 평화주의다. 이 평화주의는 특히 신자들을 박해할 수도 있는 공동체 외부 사람들을 대할 때 작동하지만(롬 12:14-21), 비보복과 평화 중재가 교회 안에도 필요하다는 사실은 하나님도 아시고, 바울도 안다(살전 5:11-15).
_4장 |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