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 K. 체스터턴 탄생 150주년 기념 대표작,
『이단』『정통』『영원한 인간』 출간!
“체스터턴은 하나의 장르다.
그의 작품은 시대를 초월하여 빛을 발하는
‘오늘을 위한 명저’다.”
G. K. 체스터턴 탄생 150주년을 맞이하여 복 있는 사람에서 출간하는 ‘G. K. 체스터턴 대표 3부작’은 가장 영향력 있는 변증서로 꼽히는 『이단』『정통』『영원한 인간』으로 구성된 시리즈다. 저자 특유의 언어적 기교와 통찰을 잘 살린 번역과 더불어 친절한 해설을 통해 매력적인 체스터턴의 세계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G. K. 체스터턴 『이단』 국내 최초 번역 출간”
『이단』(Heretics)은 조지 버나드 쇼, H. G. 웰스, 러디어드 키플링 등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영국 지성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을 비판하는 스무 편의 글을 모은 책이다. 체스터턴이 보기에 그들은 사물과 현상, 인간과 세계의 본질은 탐구하지 않은 채 현실과 실제만을 강조하고 효능과 능률만을 목표로 삼는 이단들이다. 그는 실증주의, 진보주의, 상대주의, 회의주의, 제국주의, 세계주의를 포함한 근대 지성의 모순을 특유의 위트와 역설을 동원해 비판하는 동시에 철학과 사상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선정 ‘20세기 최고의 책’ 『정통』 출간”
『정통』(Orthodoxy)은 근대 지성의 모순을 비판한 『이단』(Heretics)과 짝을 이루는 책으로, 오늘날 그리스도교에 관한 독특한 이해를 보여 주는 그리스도교 변증학의 대표적인 저서로 남아 있다. 『정통』에서 체스터턴은 자신이 그리스도교를 정통으로 받아들이게 된 과정을 논리적이고 철학적으로 설명한다. 그는 현대 사상 전반에 깔린 이성주의와 회의주의가 갖는 오류와 한계를 지적하면서 지나친 이성의 강조는 오히려 광기에 가깝고, 무한히 자유로운 의심은 오히려 사유의 자살을 초래한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대 사상의 오류와 한계를 극복하는 정통의 진리로서 그리스도교를 제시한다.
“G. K. 체스터턴 『영원한 인간』 출간 100주년 기념판 출간”
『영원한 인간』(The Everlasting Man)은 흔히 ‘대작 없는 대가’로 불리는 체스터턴의 저서 중에서 대작이라 불릴 만한 작품이다. 이 책이 특별히 주목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인류의 역사 전체를 다시 쓴 거대하고도 독특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정통』(Orthodoxy)이 체스터턴 자신의 영적 여정을 바탕으로 쓴 호교론이라면, 『영원한 인간』은 인류 전체의 영적 여정을 바탕으로 쓴 호교론이다. C. S. 루이스는 무신론자였던 자신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몇 가지 계기 가운데 하나로 이 책을 꼽았으며, 이후 그리스도교 변증론의 고전이자 그리스도교적 세계관과 인간관을 흥미롭게 보여 주는 작품으로 권장되어 왔다.
체스터턴의 대표작들은 단지 체스터턴이란 작가의 문학적 성취를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의 사고와 생활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반성하는 계기로서 큰 의미가 있다. 비그리스도인은 체스터턴의 역설을 통해 현대 세계의 인간관과 세계관을 다시 돌아보며 그리스도교를 통해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을 경험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혁명’이라 불릴 수 있을 만큼 역동적인 그리스도교를 다시 발견하게 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이단』
01 서론: 정통의 중요성에 관하여
02 부정적인 정신에 관하여
03 러디어드 키플링, 그리고 세상을 작게 만드는 일에 관하여
04 버나드 쇼
05 H. G. 웰스와 거인들
06 크리스마스와 유미주의자들
07 오마르와 성스러운 포도나무
08 온화한 황색 언론
09 조지 무어의 심기
10 샌들과 단순함에 관하여
11 과학과 야만
12 이교주의와 로즈 디킨슨
13 켈트족과 켈트광
14 어떤 현대 작가들과 가족이라는 제도에 관하여
15 세련된 소설가들과 세련된 상류층
16 맥케이브와 신적인 경망
17 휘슬러의 재치
18 ‘젊은 나라’라는 오류
19 빈민가 소설가와 빈민가
20 결론: 정통의 중요성에 관하여
G. K. 체스터턴 연보
옮긴이의 글
『정통』
머리말
01 서론: 그 밖의 모든 것을 옹호하며
02 미치광이
03 생각의 자살
04 요정나라의 윤리
05 세계의 깃발
06 그리스도교의 역설
07 영원한 혁명
08 정통의 낭만
09 권위와 모험가
G. K. 체스터턴 연보
옮긴이의 글
『영원한 인간』
머리말
서론: 이 책의 얼개
1부 인간이라 불리는 피조물에 대하여
-
01 동굴 속 인간
02 교수들과 선사 시대 사람들
03 유구한 문명
04 하나님과 비교종교학
05 인간과 신화들
06 마귀들과 철학자들
07 신들과 마귀들의 전쟁
08 세상의 끝
2부 그리스도라 불리는 사람에 대하여
-
01 동굴 속 하나님
02 복음의 수수께끼들
03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이야기
04 이단들의 증언
05 이교주의로부터의 탈피
06 신앙의 다섯 죽음
결론: 이 책의 요약
부록 1. 선사 시대 인간에 대해
부록 2. 권위와 정확성에 대해
G. K. 체스터턴 연보
옮긴이의 글
11-12쪽
오늘날 ‘정통’이라는 말의 쓰임새보다 현대 사회의 거대하고 고요한 악을 더 기묘하게 보여 주는 것은 없다. 지난날 이단은 이단이 아니라고 자부했다. 세상의 왕국과 경찰과 판관이 이단이었고, 이단은 정통이었다. 이단은 세상의 왕국과 경찰과 판관에 맞선다며 자랑하지 않았다. 맞서 일어난 쪽은 저들이었다. 군대는 무력으로, 왕은 차가운 얼굴, 근엄한 국정, 합리적 법치로 이단에 맞섰다. 모두가 길을 잃고 헤매는 양 같았다. 저마다 정통임을, 자신이 옳음을 자부했다. 저 울부짖는 광야에 홀로 선 사람, 그는 하나의 인간 그 이상이었다. 그는 하나의 교회였다. 우주의 중심이었다. 그를 둘러싸고 온 별들이 운행했다. 기억에서 잊힌 지옥의 온갖 고문도 그에게 이단임을 인정하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요즘은 이단임을 뽐내는 표현들을 사용한다. 의식적인 웃음을 짓고서 “난 꽤나 이단적인 사람입니다”라고 말하고는 박수를 기대하며 주위를 둘러본다. ‘이단’이라는 말은 더 이상 그릇됨을 뜻하지 않는다. 사실상 명민하거나 용감하다는 뜻이다. ‘정통’이라는 말은 더 이상 옳음을 뜻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릇됨’을 뜻한다. 이 모두가 의미하는 건 하나다. 자신이 철학적으로 옳은지에 대해 사람들이 무심해졌다는 것. 이단이라고 고백하려면 먼저 제정신이 아니라고 고백해야 하는 것이 자명한 이치다. 빨간 넥타이를 한 보헤미안이 정통을 내세우는 건 당연하다. 폭탄을 설치하는 폭파범은 그가 무엇이건 간에 스스로 정통이라고 여겨야 한다.
『이단』 ‘01 서론: 정통의 중요성에 관하여’ 중에서
204-205쪽
어떤 의미에서는 좋은 문학 작품을 읽는 것보다 나쁜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 더 가치 있다. 좋은 문학 작품은 우리에게 한 사람의 정신을 이야기해 줄 것이다. 반면에 나쁜 문학 작품은 우리에게 많은 사람의 정신을 이야기해 줄 것이다. 좋은 소설은 우리에게 그 주인공에 대한 진실을 말해 준다. 나쁜 소설은 우리에게 그 작가에 대한 진실을 말해 줄 뿐만 아니라 그 독자들에 대한 진실을 말해 준다. 그리고 정말 이상하게도, 나쁜 소설은 우리에게 그것을 지은 동기가 오히려 더 냉소적이고 비도덕적이라고 알려 준다.
한 권의 책이 책으로서 더 부정직할수록 공문서로는 더 정직해진다. 신실한 소설 한 편은 특정한 한 사람의 단순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신실하지 못한 소설 한 편은 인류의 단순성을 드러낸다. 인간의 깐깐한 결정들과 몇몇 재조정 사항들은 두루마리 문서들과 법전들과 경전들에 나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가정들과 마르지 않는 기력들은 1페니짜리 잡지와 반 페니짜리 통속 소설1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진짜 교양을 지닌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한 사람이 좋은 문학에서 배울 것은 좋은 문학을 감상하는 능력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반면에 나쁜 문학에서는 제국을 다스리고 인류의 지도를 살피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단』 ‘15 세련된 소설가들과 세련된 상류층’ 중에서
18-19쪽
이 책이 농담이라면, 그건 나 자신에 대한 농담이다. 나는 대담무쌍하게도 이미 발견된 것을 발견한 사람이다. 이어지는 글 속
에 소극(笑劇)의 요소가 하나라도 있다면, 그 소극은 나를 희생시켜 웃기는 소극이다. 이 책은 내가 어떻게 스스로 브라이턴에 첫발을 디딘 사람이라고 믿었다가 실은 마지막으로 발을 디딘 사람이었음을 깨달았는지 설명한다. 이 책은 또한 훤히 보이는 것을 찾아 떠난 엄청난 나의 모험들을 이야기한다. 이런 내 경험을 나 자신보다 더 우스꽝스럽게 여길 사람은 없다. 어느 독자도 내가 여기서 나 자신을 바보로 만들려 한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내가 바로 이 이야기의 바보이니, 어떠한 반역자도 나를 이 왕좌에서 끌어내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19세기 말의 그 모든 천치 같은 야망들을 자유로이 인정한다. 여느 진지한 소년들이 그러하듯 나도 시대를 앞서가려고 애썼다. 그들처럼 나도 진리보다 10분 앞서가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내가 1,800년이나 뒤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진리들을 입 밖에 내어 말할 때도, 고통스러울 만큼 어린아이같이 과장하며 목소리를 쥐어짰다. 그리고 가장 알맞으면서도 가장 웃기는 방식으로 벌을 받았다. 내가 진리들을 간직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진리들이 진리임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단지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을 따름이다. 내가 홀로 서 있다고 믿었을 때, 사실 나는 온 그리스도교 세계에 의해 지탱되는 그 우스운 위치에 서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시기를! 나는 독창적이려고 애썼던 것 같다. 하지만 문명화된 종교, 그 기존 전통의 열등한 복제품을 홀로 발명해 냈을 따름이다. 앞의 이야기에서 요트를 타고 여행에 나선 사람이 자기가 잉글랜드를 최초로 발견했다고 생각했듯이, 나는 내가 유럽을 최초로 발견한 줄 알았다. 나는 나의 이단을 창설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나의 이단에 마지막 손길을 가하는 순간, 나는 그것이 정통임을 발견했다.
『정통』 ‘01 서론: 그 밖의 모든 것을 옹호하며’ 중에서
217쪽
덧없이 왜곡된 현대의 ‘힘’에 대한 백 가지 해답 가운데 하나는, 가장 신속하고 대담한 작용이 가장 연약하거나 감성으로 가득 찬 작용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가장 재빠른 것들은 가장 부드러운 것들이다. 새가 활발한 것은 부드럽기 때문이다. 돌이 무력한 것은 단단하기 때문이다. 돌이 그 본성에 의해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 까닭은 단단함이 곧 약함이기 때문이다. 새가 그 본성상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까닭은 약함이 곧 힘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힘 안에는 일종의 부박함, 스스로 공기 중에 떠 있을 수 있는 공기 같은 가벼움이 있다. 기적적인 역사를 조사하는 현대인들은 위대한 성인들의 한 가지 특징이 ‘공중부양’임을 엄숙히 인정했다. 성인들은 더 멀리까지 나아간다. 위대한 성인들의 한 가지 특징은 가벼움의 능력이다. 천사들이 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가벼이 여기기 때문이다. 이는 언제나 그리스도교 세계의 천분(天分)이었으며, 특히 그리스도교 예술의 천분이었다.
『정통』 ‘07 영원한 혁명’ 중에서
30-31쪽
다만 이 모두를 분명하게 보려면 하나의 전체로서 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것들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만이 아니라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도 보아야 한다. 이 이야기에서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운 부분은 이렇게 시작된 것들이 이렇게 전개되었어야 했다는 점이니 말이다. 순전히 상상에 빠져서 마음껏 즐기기로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른 일들이 일어났을 수도 있고 다른 존재들이 진화해 나갔을 수도 있음을 상상할 수 있다. 일어났을 수도 있는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종의 진화론적인 평등을 떠올려도 되겠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들을 대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예외와 경이를 마주해야 한다. 사람이 동물에 불과했던 때가 있었다면, 우리는 하려고만 한다면 인류가 걸어온 이력이 어떤 다른 동물에게로 전이된 모습도 상상해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코끼리가 그 엄니와 코처럼 생긴 탑들로 코끼리식 건축물을 짓고 그 어떤 거대한 규모도 넘어서는 도시를 건설한다는 재미난 환상 문학 작품을 집필할 수도 있겠다. 소가 의복을 개발하여 두 켤레의 장화를 신고 두 벌의 바지를 입는다는 유쾌한 우화를 구상할 수도 있겠다. 어떠한 초인보다 경이로운 슈퍼 원숭이를 상상할 수도 있다. 이 짐승이 네 발을 손처럼 써서 조각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요리도 하고 가구도 만드는 모습을 떠올려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들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인간이 고요한 벼락과 같은 속도로 천문학적 공간들의 거리만큼이나 멀리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구별된 존재가 되었다고 결론 내려야 할 것이다.
『영원한 인간』 ‘서론: 이 책의 얼개’ 중에서
457-458쪽
그리스도교가 하나의 정신으로 남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교가 하나의 유령으로 남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유령으로 남지 않을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죽음이란 과정에 뒤이어 오는 것은 질질 끌리며 남아 있는 그림자가 아니라 육체의 부활이다. 그리스도교가 하나의 정신으로 남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경건하고 겸허한 눈물을 ‘사람의 아들’의 성묘에 떨굴 준비가 잘 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아침 동산 위로 다시 거니시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이제까지 이 사람들은,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옛 그리스도교의 촛불이 흔한 일상의 불빛 속으로 서서히 사라지리라는 관념에 무척이나 익숙해져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에게 그것은 참으로 한낮의 햇빛 속에서 타오르도록 남겨진 창백한 노란 빛의 촛불처럼 보였다. 일곱 촛대가 갑자기 기적의 나무처럼 하늘로 높이 뻗고 태양이 창백해지도록 타오르는 건 더더욱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러하기에 잘못 알기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지나간 다른 시대에는 대낮의 햇빛이 촛불을 정복했고, 그런 다음엔 촛불이 햇빛을 정복했다. 다시금 계속해서 우리 시대 이전 사람들은 희석된 교의에 만족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다시금 계속해서 그런 희석에 뒤이어, 진홍빛 폭포가 어둠을 깨치고 나오듯 본래의 붉은 포도주가 힘차게 쏟아져 나왔다.
『영원한 인간』 ‘2부 06 신앙의 다섯 죽음’ 중에서
G. K. 체스터턴은 삶을 가장 깊이 보고 드러낸 천재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이단』은 현대 사회를 형성하는 사상에 도전하며 우리가 가진 신념의 기초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책이다. 당대의 유명한 예술가와 사상가들의 철학을 비판하고, 상대주의, 세속주의, 개인주의를 체스터턴 특유의 유머와 통찰로 접근한다. 『이단』은 당대의 관점을 문제 삼고 치밀하게 비판하지만 비판하는 인물들에 대한 존경심은 잃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체스터턴은 진리, 전통, 도덕적 명확성이 진정한 삶에 얼마나 중요하고, 새로움과 유행과 대세를 중시하는 현대 세계에서 기본 원칙이 왜 필요하며, 비판을 넘어 의미 있는 논의와 진리 추구를 왜 이어 나가야 하는지를 자신이 문제 삼는 예술가와 작가들을 통해서 보여 준다. 지적 진실과 철학적 깊이를 추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진심으로 추천한다.
『정통』은 그의 신앙 여정을 담은 독창적인 작품이다. 책 전반에 걸쳐 체스터턴은 신앙, 의심, 이성을 기발한 유머와 깊은 통찰로 풀어낸다. 이 과정을 통해 신앙의 의미와 삶의 경이를 누구보다 탁월하게 그려 낸다. 복잡한 신학 개념을 특유의 역설로 풀어내어 신앙의 아름다움과 논리를 이해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 또한 체스터턴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다. 사도신경으로 고백하는 신앙이 지적으로 말이 되고, 도덕적으로 책임질 수 있고 미적으로도 만족스러움을 보여 준다. 신앙의 논리와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존재의 충만과 기쁨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진심으로 추천한다.
『영원한 인간』은 체스터턴이 1922년 뒤늦게 세례를 받은 뒤 3년 만에 쓴 책이다. 이 책은 인류의 정신적 여정을 추적하며 기독교를 방어하고, 문명의 발전에 대한 신선한 관점을 제공한다. 『영원한 인간』이 특별한 이유는 지적 깊이와 유머를 결합해 복잡한 개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낸다는 점이다. 체스터턴의 독창적인 문체는 주의해서 천천히 읽어야 하지만 집중해서 따라가다 보면 매우 깊이 있는 사고의 경험을 독자에게 안겨 준다. 이 책에서 체스터턴은 순수한 물질적 진보를 넘어서서, 인류의 의미 추구에 대한 궁극적 해답으로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기독교의 장대한 서사를 펼친다. 『영원한 인간』은 단순한 역사책이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게 눈을 열어 주는 책이다. 지적인 만족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깊은 울림을 줄 작품으로 믿고 진심으로 추천한다.
강영안│한동대학교 석좌교수,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외길을 따라 걷는 일은 단조롭기는 하지만 번뇌는 많지 않다. 갈림길 앞에 설 때는 잠시 망설이지만 결국은 하나의 길을 택해 걷는다. 문제는 사방팔방으로 열린 길 앞에 설 때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기웃거리는 동안 방향감각을 잃은 채 주저앉고 만다. 낯선 세계를 찾아가기보다는 익숙한 길 위에 집을 짓고 머물기로 작정한 것이다. 지금 우리 형편이 그러하다. 예수를 길이라 고백하면서도 그 길을 걷지 않는다.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때부터인지 신학은 인접 학문과 깊은 대화를 나누거나 논쟁을 벌이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담론 지평에서 신학은 설 자리를 잃었다. 고립과 단절이 심화되면서 신학의 삶의 자리인 교회는 점점 폐쇄적으로 변하고 있다. 이런 시기에 150년 전에 태어난 영국 사상가 G. K. 체스터턴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는 기독교 변증가로서 당대의 지식인, 예술가, 문학인들의 사상과 씨름하는 일을 꺼리지 않았다. 『이단』은 그들의 빛나는 성취를 따라가면서도 그들의 한계와 오류를 포착하여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이단’ 하면 사이비 종교가 떠오르게 마련이지만, 체스터턴이 말하는 이단은 우리로 하여금 진리의 깊은 세계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가리킨다. 『이단』이 부정의 방식으로 진리에 다가서는 책이라면, 『정통』은 자기를 사로잡고 있는 신앙의 핵심을 긍정의 방식으로 서술하는 책이다. 저자는 자기의 내면과 세상을 세심하게 살피면서 그 속에 깃든 진리를 탐구한다. 그가 그러한 사유의 모험을 통해 당도한 세계는 기쁨의 세계다. 『영원한 인간』은 그러한 사유의 행로가 당도한 세계 인식을 인류 전체의 영적 여정으로 확장하여 풀어낸다. 유려하고 장엄하다. 체스터턴의 책을 읽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가 전개하는 논리의 세계에 익숙해지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그의 안내를 따라 차분히 사상의 광맥을 탐색하다 보면 저절로 마음이 고요해지고, 피상적인 세계 너머에 있는 더 깊은 세계와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세계와 대면하는 순간 우리는 소비사회가 건네는 행복의 환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행복이 있음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김기석│청파교회 원로목사
『이단』은 현대의 ‘이단들’, 러디어드 키플링, 조지 버나드 쇼, H. G. 웰스처럼 당대 영국 지성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던 지식인들, 그리고 지적 흐름에 대한 비평서다. 하지만 이때 ‘이단’은 경멸어가 아니다. 체스터턴에게 ‘이단’은 진지하게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적’, 그 목소리를 충분히 새겨들어야 할 ‘적’을 향한 명예로운 호칭이다. 그는 적을 함부로 깎아내리지 않고 ‘적’의 발언을 충분히 새기고, 그가 지닌 무기의 장단점을 찬찬히 해부한다. 그리고 그 무기의 쓰임새를 완벽하게 파악한 뒤 그 무기가 적 자신을 겨누게 만들어 자멸하게 만든다. 그렇게 그는 ‘정통’과 ‘이단’이라는 케케묵어 보이는 도식, 구시대의 유산이 되어 버린 것만 같은 도식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놀랍게도, 이 진지한 탐구는 딱딱하고, 무겁고, 완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체스터턴은 ‘이단 중의 이단’, ‘적 중의 적’은 유쾌함과 미소를 잃고 창백해진, 완고한 인간의 정신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리스도교 지성사, 사상사를 훑으면 쾌활함과 호방함을 느낄 수 있는 글이 전혀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 누구도 체스터턴만큼 그리스도교 신앙과 유쾌함이 나란히 갈 수 있음을 보여 주지 못했고, 선 굵은 유쾌함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덕목, 복음에 사로잡힌 이의 미덕일 수 있음을 보여 주지 못했다. 호방한 안내자 체스터턴과 함께 친애하는 적들과 대화를 나누며 우리는 때로는 길을 잃고, 때로는 예기치 못한 풍경과 마주친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깨닫는다. 진정한 정통이란 이단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 오히려 이단과의 대화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하는, 살아 있는 전통임을.
『정통』은 20세기 초 지성계에 갑작스럽게 등장해 나부낀 기이한 깃발이다. (다른 이름들을 열거할 수도 있지만, 이 책에 주로 등장하는 인물들을 빌려 표현하자면) 니체로 대표되는 허무주의, 조지 버나드 쇼로 대표되는 냉소주의, H. G. 웰스로 대표되는 진보주의가 삼두마차를 이루어 무너져 내린 그리스도교 세계 위를 질주하던 시대에 체스터턴은 놀랍게도 ‘정통’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깃발을 들어 올린다. 깃발을 흔들며 그는 인간을 위한다면서 인간의 이성, 감성, 의지를 찢어 따로 나아가게 만드는, 결국 인간의 인간다움을 파괴해 버리는 근대성이라는 거대한 리바이어던에 맞서 참된 인간다움을 회복할 것을 촉구한다. 그리고 동시에 저 리바이어던에 맞설 검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음을, 그것은 당시에도 구시대적이며 비합리적이며 억압적인 것으로 간주되던 기독교임을 환기한다. 깃발을 따라 진군을 하며 리바이어던의 모습은 점점 더 분명히 드러나고, 그만큼 오랫동안 한 번도 제대로 쓰이지 못한 채 검집에 갇혀 있던 검의 모습도 선명해진다. 그리고 그 검에는 이런 문장이 새겨져 있다. ‘영원과 시간이 만났으니 희망이 절망을, 기쁨이 슬픔을 끌어안는다. 모든 것이 새로움으로 빛나니, 거듭난 그대여, 용기를 내어라.’
『영원한 인간』은 독특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독특한 책이며 다면적인 작품이다. 이 책은 역사서이면서 동시에 역사서가 아니고, 비평서이면서 동시에 비평서가 아니며, 변증서이면서 동시에 변증서가 아니고, 신학서적이면서 동시에 신학서적이 아니며, 종교학 서적이면서 동시에 종교학 서적이 아니고, 문명론이면서 동시에 문명론이 아니다. 『영원한 인간』은 인류학, 역사, 신학, 철학, 종교학, 사회 비평, 문명론을 아우르는 책임과 동시에 이를 넘어선 책이다. 출간 이후 지금까지 그리스도교 변증의 고전으로 평가받지만, 그런 공식적인 평가는 체스터턴의 다른 그리스도교 저술이 그러하듯 이 책의 독특한 풍미와 신선함을 오히려 가리는 측면이 있다. 인간의 독특성에 대한 그의 성찰, 비교 종교학의 한계, 다양한 고대 문명에 대한 비평,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무이함에 대한 주장, 그리스도교 교리가 품고 있는 역설들에 대한 설명, 교부들의 지혜에 대한 해설, 중세 그리스도교에 대한 재평가, 근대의 과학주의, 유물론, 상대주의 비판은 각각의 색을 발하면서 한데 어울려 하나의 거대한 스테인드 글라스를 이룬다. 일부 조각은 둔탁해지고 낡고 몽글어졌다 해도 『영원한 인간』이라는 스테인드 글라스의 아름다움은 결코 쇠하지 않는다. 이 창이 가리키는 빛, 이 창을 통해 우리가 보게 되는 빛이 결코 쇠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경찬│비아 편집장
『이단』은 20세기의 저명한 기독교 지성인 G. K. 체스터턴이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과 벌였던 논쟁을 담고 있다. 체스터턴의 논증은 조각이 많은 명화 퍼즐과도 같아서, 일부만 읽었을 때는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명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그는 직설적인 논리보다는 역설과 아이러니, 유머를 활용하여 비판의 대상을 해체한다. 그리고 마침내 부분이 모여 전체가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출간된 지 100년이 지난 이 책이야말로 현시대의 문제를 선명하게 포착한 진단서임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이단』은 책 전반에 걸쳐 체스터턴의 예언자적인 통찰을 담고 있다. 특히 본격적인 다원주의 사회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그것을 예측하고 우려한 그의 통찰력은 놀랍다. 확고한 선과 진리, 의미에 대해 더 이상 말할 수 없게 된 시대에 대해 체스터턴은 ‘악하다’는 정죄 대신 ‘약하다’는 평가를 내린다. 우리는 머리로는 보편성을 부정하는 한편, 보편적인 기준에 맞춰 타인의 흠결을 발견하는 데 혈안이 된 사회에 살고 있다. 그것이 오늘날 체스터턴의 이야기가 뼈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다.
『정통』은 나의 첫 출간을 좌절시킨 애증의 책이다. 부푼 마음으로 기독교 변증서를 집필하던 당시, 단순히 참고 자료로 삼기 위해 이 책을 처음 집어 들었다. 그러나 이는 축복인 동시에 치명적인 실수였다. 『정통』은 더 이상 변증서에서 신선한 내용을 찾지 못할 것이라는 나의 오만을 산산이 부수었고, 더 나아가 스스로 작가가 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의심을 품게 만들었다. 이 의심은 회의감으로 이어져 결국 첫 원고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 만족스러운 저서를 출간한 지금도 『정통』이 경이로운 책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 책의 모든 챕터에는 기독교에 대한 체스터턴 특유의 예리한 통찰과 독창적인 논리가 빼곡히 담겨 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그의 글쓰기에 잠시 정신이 혼미해지겠지만, 정신을 차릴 즈음에는 어느새 그에게 설득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특별히 체스터턴 특유의 직관적이면서도 탁월한 비유들은 왜 그가 C. S. 루이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작가 중 한 명으로 거론되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영원한 인간』은 인류 역사와 종교의 발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하는 걸작이다. 특히, C. S. 루이스가 여러 차례 ‘최고의 기독교 변증서’라 칭하며, 그가 무신론을 버리게 된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로 꼽은 책이기도 하다. 이번에 직접 읽어 보니 그 평가가 과장이 아님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 책이 과학적 주제도 일부 다루고 있는 만큼, 새로운 발견들을 토대로 반박된 부분이 있는지 열심히 팩트를 체크하며 읽었다. 세부적인 논쟁거리도 있었지만, 오히려 1900년대 초반에 쓰인 책이 이토록 정확하게 현대의 발견들을 예견했다는 사실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 보자면, 체스터턴은 선사시대 인간에게 종교가 없었을 것이라는 당대 역사가들의 주장을 순수한 논리만으로 비판하는데,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들은 그의 견해가 옳았음을 입증해 준다. 『영원한 인간』은 과학과 역사의 외피를 쓰고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지우려는 시도들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또한 모든 종교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주장에 맞서 기독교와 그리스도의 독특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과학, 철학, 역사, 종교를 아우르며 독창적인 통찰과 직관, 때로는 유머와 비유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체스터턴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단순한 책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블록버스터 영화에 가깝다. 티저는 여기까지, 본편은 직접 확인해 보시길 바란다.
이번에 복 있는 사람에서 출간되는 체스터턴의 세 대표작 『이단』『정통』『영원한 인간』은 모든 독자에게 큰 자산이자 지혜의 보고가 될 것이다. 시대를 초월하여 빛나는 이 작품들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내가 느꼈던 감동과 경이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오성민│유튜브 채널 Damascus TV 운영자
체스터턴의 기독교는 유쾌하고 상쾌하고 통쾌하다. ‘기쁜 소식’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세계의 모순을 구원해 주는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의 역설을 거침없이 전시하기 때문이다. 체스터턴은 하나의 장르다. 시대정신(‘이단’)들의 진부함과 ‘정통’의 혁명성을 그보다 더 선 굵게 통찰하고 위트 있게 묘사한 작가는 없다. C. S. 루이스가 경고했듯이, “건전한 무신론자로 남아 있고자 하는” 이는 『영원한 인간』 같은 책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말지어다.
이종태│서울여자대학교 교목실장
체스터턴은 러디어드 키플링, 조지 버나드 쇼, H. G. 웰스 등 당대 영국의 가장 날카롭고 자부심 강한 저자들을 소환하고 논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논쟁은 상대에 대한 존경과 인정에서 시작하지만 부분적인 것이 아닌 전체적인 진리를 향해 타협 없이 나아간다. 체스터턴은 중세 철학과 신학의 거장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신을 다시금 살려내고 있다. 그가 토마스 아퀴나스에 탄복하는 것은 이 ‘천사적 박사’ 안에 그리스도교가 오랜 역사 안에서 공들여 키워 오고 날카롭게 갈고닦은 진정한 이성의 정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이성은 신비 앞에 겸손할 줄 안다. 그는 이와 대조되는 ‘이단’의 정신인 상대주의와 주관주의와 과학주의에 고착되어 가는 당대의 지적 경향을 비판한다. 그리고 문학과 예술과 학문이 허영과 오만의 그림자에서 자주 잊는 중요한 문제를 다시 상기시킨다. ‘어떻게 인류가 인간성을 잃지 않을 것인가?’ 이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 역시 절박하며, 백 년이 지난 저자인 체스터턴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와 함께 우리는 그리스도교를 통해 이 세상에 전해진 참된 ‘겸손’의 의미를 숙고한다. 이는 사유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며, 신비를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역설을 마주하며, 체념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부단히 진리를 찾고 행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체스터턴의 말처럼 겸손은 “이 지구와 별들을 새롭게” 한다.
『정통』은 의심의 여지 없이 체스터턴의 그리스도교 호교론 저술 중 가장 아름답고 우아하며 영감을 주는 책이다. ‘브라운 신부 시리즈’를 통해 체스터턴을 사랑하게 된 수많은 독자들은 이 저서를 통해 브라운 신부가 어떻게 그토록 ‘순진함’과 ‘지혜’를 이음새 없이 한몸에 지니는 동시에, 인간의 선함과 약함이 만들어 내는 역설을 과장과 미화 없이 받아들이며 환상이 아니라 ‘실재’를 바라볼 수 있었는지 그 비밀을 만나게 될 것이다. 체스터턴은 인간이 구원되는 것은 어떤 한 가지 진리에 몰입함으로써가 아니라 마음과 정신이 온전하게 올바른 자리를 찾을 때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을 신뢰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사랑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며, “세속적으로 되지 않으면서 세상을 사랑해야” 하는 것임을 알려 준다. 이는 자기중심적이며 계산적인 편협한 이성이 아니라, 상식을 중히 여기며 시인의 마음을 알고 모순과 역설을 받아들이는 균형 있는 정신에게 가능한 삶의 모습이다. 이러한 정신은 참된 신비주의이기도 하다. 신비주의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의 도움을 받아 모든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겸허한 정신이기 때문이다. ‘정통’은 이러한 정신이 사라지지 않게 지켜 온 교회의 본질이며, 늘 피어나는 ‘오래된 새로움’이다. 온전한 정신을 찾고 지키기 어려운 시대에 『정통』은 진실로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거듭 음미할 가치가 있는 ‘오늘을 위한 명저’다.
체스터턴은 진보 사상이 절정에 이르고 근대주의자들이 ‘역사의 종언’을 자신하던 시기에 적대심과 두려움이 아니라, 변치 않는 진리에 대한 신뢰와 세계에 대한 참된 사랑에 힘입어 용감하고 진실되게 오늘을 위한 그리스도교 호교론을 정립하고자 한 인물이다. 우리는 그의 주저이며 대작인 『영원한 인간』에서 그가 얼마나 이 어려운 과업을 훌륭하게 해냈는지를 확인한다. 여기서 체스터턴은 마치 적진을 홀로 돌파하는 장수와도 같이 근대사조의 맹점과 오만을 호쾌하게 논박하고 인류의 여정 안에서 그리스도교가 걸어 온 길을 근원적이면서도 새롭게 조명한다. 이 작품은 결코 읽기 쉬운 책이 아니다. 때로는 선사 시대의 길고 어두운 동굴을 탐험하듯이 다음 모퉁이에서 어떤 이야기와 인물이 나올지 예상하기 힘들고 당혹스럽다. 그런가 하면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처럼 황홀하면서도 가늠하기 힘든 표상과 비유로 가득찬 사유가 몰아친다. 섣부른 요약과 단정을 거부하는 이 책은 독자에게 끊임없이 도전하며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 보답은 크다. 체스터턴과 함께 사유의 격전을 함께한 독자라면, 그리스도교가 인류에게 선사한 세계가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 장관이었는지를 깊고 강렬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근원적인 질문에 답하는 책이다. ‘그리스도교는 세상에 어떤 새로운 것을 가져다주었는가?’
최대환│천주교 의정부 교구 신부
G. K. 체스터턴은 20세기에 기독교 전체를 변호한 가장 유능한 변증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데일리 뉴스』와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의 칼럼을 쓰면서 글쓰기 기술을 발전시켰고, 1930년대에는 BBC에서 친근히 들을 수 있는 목소리가 되었다. 언론인이자 소설가로서 유머러스하고 교조적이지 않은 글쓰기 스타일은 많은 추종자를 불러 모았고, 그를 기독교를 대표하는 지도적인 공적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우리는 체스터턴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아마도 가장 명백한 출발점은 그의 명료하고도 명석한 글쓰기 스타일일 것이다. 신앙에 대한 접근하기 쉽고 흥미를 끄는 그의 설명은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받았다. 변증 스타일 또한 독특하다. 체스터턴은 세계를 이해하는 한 방식으로서의 기독교를 일관되게 변호하지만, 그의 접근법은 기술적이거나 교조적이지 않다. 그는 일반인을 위해 신앙을 매력적으로 진술하며, 언론인으로서의 기술을 활용하여 한편으로는 신학 용어를 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풍부한 유비와 은유를 사용하여 세상에 대한 인간 공통의 경험과 기독교를 설득력 있게 연결한다.
알리스터 맥그래스
『영원한 인간』은 나의 직업적 태도와 삶의 철학을 형성한 책이자, 내가 아는 한 기독교의 입장을 가장 잘 변호한 책이다. 그가 왜 그토록 염세주의와 무신론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나를 사로잡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맥도널드를 읽을 때처럼 체스터턴을 읽을 때도 나는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무릇 건전한 무신론자로 남아 있고자 하는 젊은이는 자기의 독서생활에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법이다. 허버트의 말처럼, 어디에나 “펼쳐진 성경, 수백만 가지 놀라운 일, 정교한 그물과 책략”이라는 덫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마다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C. S. 루이스
체스터턴은 나의 영적 여정에서 중요한 발걸음을 내딛을 뿐 아니라 신앙의 기쁨을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복음주의자들은 종종 기독교를 ‘반문화’라고 말한다. 체스터턴이라면 아마 “아니요, 기독교는 문화이며 이단이야말로 반문화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문화를 재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화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포함된다. 체스터턴이 『이단』을 썼지만, 그는 항상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 진정으로 소통했다. 우리 대부분은 ‘이단자’라고 하면 종교재판과 인상을 찌푸린 채 교수형을 집행하는 종교재판관을 떠올린다. 하지만 체스터턴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그의 신학은 종교재판관들 못지않게 강력했지만,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그의 태도는 연민과 존중과 유머였다. 교회가 이러한 기술을 습득할 수만 있다면 더럽혀진 교회의 평판을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누군가가 체스터턴에게 만일 무인도에 고립된다면 무슨 책을 갖고 싶은지 묻자, 그가 잠시 생각한 뒤에 “물론 배 만들기에 관한 안내서죠”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만일 내가 그와 같은 상황에서 성경 이외의 한 권을 고를 수 있다면, 체스터턴의 영적 자서전인 『정통』을 선택할 것이다. 『정통』은 나의 영적 여정에서 그 어떤 책보다 큰 영향을 끼친 책이다. 무엇보다 내 신앙에 신선함과 새로운 모험 정신을 불어넣어 주었다. 지금도 신앙이 메말라가는 것을 느낄 때마다 서가로 가서 체스터턴의 책을 집어 든다.
필립 얀시
체스터턴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모든 것에 대한 위대한 전복자다. 그는 통찰력으로 우리를 확장하고, 놀라운 역설로 우리를 흔들며, 재치로 우리를 기쁘게 한다.
오스 기니스
체스터턴은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 소수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당대의 그 어떤 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 그는 영원토록 후대의 존경을 받아야 마땅하다.
T. S. 엘리엇
체스터턴은 엄청난 천재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세상은 그에 대한 감사의 말에 인색하다.
조지 버나드 쇼
체스터턴의 책은 이름을 거론할 수 있는 그 어떤 작가의 책보다 내 정신을 형성했다.
도로시 L. 세이어즈
G. K. 체스터턴의 『영원한 인간』은 해명이 필요 없는 영구적인 기념비다.
에블린 워
G. K. 체스터턴은 특유의 재치와 지혜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영감을 주고 회의론자들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그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날카로운 분석을 제공한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